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빛'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신보슬 큐레이터

LED 라이트를 단 장갑을 끼고, 허공을 향해 이리 저리 팔을 돌리고 움직인다. 의미 없는 듯 보이는 허공을 향한 몸짓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 누군가의 얼굴 혹은 도깨비

김태훈은 꽤 오래 이 작업을 해왔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를 마치 드로잉 펜처럼 사용하여 허공을 향해 움직이면 그것이 정확하게 특정 이미지로 드러나게 만들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카메라 렌즈를 열어 빛의 움직임을 포착한다는 것이 그리 새롭지 않은 방식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최근 LED 라이트와 웨어러블 시스템을 사용하는 다양한 실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단순히 라이트를 열어 작가의 몸짓을 통해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것은 그다지 신선하지도 매력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 또한 결과물이 ‘얼굴’이라는 것 역시 왜 ‘얼굴’이었는가? 혹은 왜 얼굴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럴듯한 답을 내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그의 작업은 일차원적으로 읽힐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태훈의 작업을 좀 더 세밀하게 보려는 이유는 그의 작업에서 기술을 사용한 그 어떤 화려한 테크닉이나 수사가 없다는 것이 어쩌면 그의 작업의 강점일 수 있기 때문이다.

LED 라이트 드로잉은 김태훈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버렸다. <얼굴>시리즈나 <도깨비> 시리즈, 그리고 <빛을 빚다>와 <반인반수>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부적 같은 느낌’을 줄 수 있기를 바랬다고 했다. 이러한 작가의 고백은 왜 하필 도깨비 얼굴이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도깨비는 서양의 ‘ghost’, ‘demon’, ‘spook’와 같은 것들과는 다르며 일본의 오니와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단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일반적인 귀신과는 달리 귀엽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때도 있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들은 대체로 착한 사람을 도와주고, 나쁜 사람들을 벌하는 경우가 많다. 오래된 빗자루나 깨진 사발, 짚신 같은 것에 혼이 들어가서 생기는 도깨비는 거짓말을 몹시 싫어하며, 밤바다에서 길을 잃은 배에게는 도깨비불로 길을 인도하기도 하고, 착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한다.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는 허황되고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두운 밤 혼자 허공에 온몸으로 그려가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도깨비가 어떤 의미였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도깨비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 그것은 ‘부적’같은 행위이다. 다시 말해 LED 라이트 드로잉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행위에 대한 이야기이지 사진이나 LED 라이트라는 재료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이 그의 LED 라이트 드로잉 시리즈를 퍼포먼스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런 맥락에서 김태훈에게 있어 사진은 사진이라는 장르로 사용하고 있기 보다는 어두운 밤, 허공을 향한 몸짓을 통해 만들었던 도깨비 얼굴을 기록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사진에서 논의 되어야 하는 것은 장르로서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 성과, 혹은 사진 속의 구도나 색감, 조형적인 배치에 있지 않다. 사진은 그의 행위가 있었다는 것, 그 행위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볼 수 없는 도깨비 형상이 드러나며 이것을 타인에게(나아가 작가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공유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여기에서 ‘사진’이라는 매체가 그의 작업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가 드러난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에게 사진은 여전히 ‘있는 것’ 혹은 ‘있었던 것’에 대한 기록으로 여겨진다. 마치 대지에서 솟구쳐 나온 듯 땅위에 솟아 오른 듯 보이는 커다란 도깨비 얼굴 사진은 김태훈에게 사진은 ‘없는 것’ 혹은 ‘있기를 바라는 것’에 대한 기록, 자신이 서 있는 빈 공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환영에 대한 기록이었다. 물론 그가 그려낸 도깨비의 형상이 실재한다고 믿을 만큼 관객이 순진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의 사진은 실재하지 않지만, 악귀를 내쫒는 부적처럼 자신이 그린 도깨비 같은 것이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행위였다는 사실이 그의 작업이 C-print라는 사진 결과물을 평가하기보다 조금 더 앞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 빈 공간에서 온몸으로 그린 자신의 드로잉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면, 신작 <공간에 그리다>는 공간에서의 드로잉 행위를 직접적으로 관객과 소통하고자 시도한다. 그래서 LED 라이트 드로잉 작업을 위해 직접 장갑에 LED 라이트를 달아서 자체제작 했던 것과는 달리 <공간에 그리다>는 립모션, 오큘러스등 최신 장비들을 사용했다. 공간을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관객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려고 했음은 다음의 작가노트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내가 인지할 수 있는 공간, 함께 느끼고 있는 공간, 보이지 않지만 주위에 있는 것에 대한 어떤 생각들. 최근 관심을 가져왔던 것들이다. 내 손이 닿을 만한 나만의 공간 안에서 행해지는 드로잉과 보이는 않는 것에 대한 생각들 한참을 그 안에 갇혀있다...함께 하는 공간을 내 것으로 다루며 시간을 채워보면 어떨가 했다. 손에 쥐어지지 않는 어떤 것으로 한 공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 관객은 어디까지 느끼고 이해하려 할까?” (작가노트 중)

 

립모션과 오큘러스는 ‘내가 인지할 수 있는 공간과 함께 느끼고 있는 공간’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관객의 손동작이 만들어내는 빛의 흔적이 화면에 남는다. 공간 안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은 관객들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제스추어가 만들어낸 화면의 흔적을 통해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작가도 프로토타입이라고 인정했듯이 <공간에 그리다> 2014년의 버전은 아직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내러티브도 아직은 부족하고, 손의 움직임이 점으로 표현되는 지점도 단순하다. 작가노트에서 언급한 ‘함께 하는 공간’ 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성격의 공간인지도 모호하다. 하지만, 립모션과 오큘러스라는 새로운 장치의 가능성을 실험한 프로토타입의 작업이라고 본다면 앞으로 나올 이후의 버전들을 기대하게 한다. 화면 속 영상과 사운드와의 접목시킨다던가, 배경 공간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이전 관객의 흔적과 이후 관객의 상호작용의 논리를 개발하는 등의 디테일한 부분들이 해결된 작품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물론 LED 라이트 드로잉에서 <공간을 그리다>로의 변화는 급작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LED 라이트 드로잉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없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과연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장비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표현력을 가질지도 의문이다. 또한 사진이라는 장르와 최신 장비를 통한 미디어아트로의 이행, 작가의 직접적인 퍼포먼스에서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의 변화는 그 어떤 논리적 연결고리도 없는 비약처럼 여겨지기 쉽다. 이런 비약은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작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자주 반복되는 경우, 작가의 주제의식마저 흐리게 하고 고민에 빠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다행히 아직 김태훈은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주제의 측면에서는 크게 흔들리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비록 아주 다른 매체를 다루고 있고, 아주 다른 결과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안에서 ‘빛’이라는 공통의 축을 잃지 않고 있으며, 공간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것에 대한 관심 역시 여전히 그에게는 큰 주제이다. 도깨비 얼굴이나 화면에 남은 점들의 흔적은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없는 것들, 바램의 흔적이자 존재의 증명이기도 하다.

이처럼, <공간에 그리다>는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 앞으로 작가가 작품을 펼쳐나가는데 있어 고민해야 하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작업들에서 관객의 비판은 때론 비평가의 평론보다 날카롭다. 때문에 형식적인 실험의 모색은 물론 미적/기술적 완성도까지 성취해야 하는 입장에서 작가에게 주어지는 부담은 더욱 크다. 하지만 허공에 무수히 많은 얼굴을 그려내었었던 김태훈이라면 끈기 있게 버티고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적어도 김태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에 대한 매력에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공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공간을 드러내며, 그곳에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그 어떤 존재 혹은 바람을 드러내보고자 계속 노력할 것이기를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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